난보쿠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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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난보쿠초 시대는 1336년부터 1392년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시대적 분열을 의미한다. 1246년 고사가 천황의 양위 이후 황통이 다이가쿠지 통과 지묘인 통으로 나뉘어 황위 계승 갈등이 발생했고, 1331년 고다이고 천황이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위해 겐코의 난을 일으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겐무 신정의 실패 이후 지묘인 통의 고묘 천황을 옹립하면서 남조와 북조로 나뉘어 대립했다. 이 시대는 몽골의 일본 원정 이후 호조 씨와 무사 집단 간의 갈등 심화, 겐무 신정의 실패 등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중재로 1392년 남북조가 통일되었다. 이 시기는 무가 정권의 확립과 상공업의 발달, 그리고 문화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오늘날까지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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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보쿠초 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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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명칭 | 남북조 시대 |
로마자 표기 | Nanboku-chō jidai |
다른 명칭 | 남북조 내란 |
기간 | 1336년 ~ 1392년 |
서력 | 1337년1월 23일 - 1392년11월 19일 |
화력 | 겐무 3년 / 엔겐 원년 12월 21일 - 메이토쿠 3년 / 겐추 9년 윤10월 5일 |
수도 | |
북조 | 교토 |
남조 | 요시노 |
정치 | |
정치 체제 | 남조: 천황 중심의 황실 권위 북조: 무로마치 막부의 무가 정권 |
주요 세력 | |
남조 | 후다이고 다이고 천황 고무라카미 천황 초케이 천황 고카메야마 천황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쓰라 구스노키 마사노리 와다 마사타케 구스노키 마사노리 (재) 구스노키 마사카쓰 시조 다카스케 시조 다카토시 기타바타케 아키노부 기타바타케 아키야스 요시나가 친왕 무네나가 친왕 닛타 요시오키 닛타 요시무네 닛타 사다카타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기타바타케 아키노부 가네요시 친왕 고세이사이쇼군미야 기쿠치 다케미쓰 기쿠치 다케마사 기쿠치 다케토모 호조 도키유키 와키야 요시스케 우쓰노미야 기미쓰나 다테 유키모토 이이 유키나오 우에스기 시게요시 하타케야마 나오무네 모모이 나오쓰네 |
북조 | 고곤 천황 고묘 천황 스코 천황 고코곤 천황 고엔유 천황 고코마쓰 천황 니조 요시모토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아시카가 요시미쓰 아시카가 다다요시 아시카가 다다후유 고 모로나오 고 모로요 고 모로나오 (재) 니키 요시나가 호소카와 기요우지 시바 요시유키 호소카와 요리유키 시바 요시유키 (재) 호소카와 요리모토 아시카가 모토우지 아시카가 우지미쓰 우에스기 노리아키 하타케야마 구니키요 시바 이에나가 하타케야마 구니우지 잇시키 노리우지 이마가와 사다요 사사키 도요 야마나 도키우지 아카마쓰 노리무라 오가사와라 사다무네 다케다 노부타케 |
주요 사건 | |
주요 전투 | 미나토가와 전투 다타라하마 전투 고노미네 전투 시조나와테 전투 |
종결 | 메이토쿠의 화약으로 인한 남북조 통일 |
결과 | |
결과 | 남북조 합일 무로마치 막부의 무가 단독 정권 성립 |
기타 | |
관련 문서 | 겐무 신정 남조 (일본) 북조 (일본) 무로마치 시대 |
2. 역사
가마쿠라 시대 후반부터 반세기 동안 양통질립이라는 부자연스러운 황위 계승이 반복되었다. 황통은 지묘인통과 대각사통이라는 두 개의 계통으로 갈라져 실질적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가마쿠라 막부 멸망과 겐무 신정 실패 후, 양 통에서 두 명의 천황이 병립하고, 교토의 북조와 요시노의 남조 두 조정이 병존하는 왕권 분열 상태가 나타났다. 양 조정은 각자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대립했고, 여러 차례 대규모 전투가 발생했다. 일본 각지에서 수호와 국인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북조 또는 남조에 가담하여 혼란이 가중되었다.
흥복사 대승원의 탐존은 『대승원일기목록』에서 “'''일천양제 남북경'''也”라고 표현했다. 이를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에 빗대어 남북조 시대로 부르게 된 것은 훗날의 일이다. 메이지 이후 남조 천황을 정통으로 보는 역사관이 정착되면서 "북조"라는 명칭이 문제시되어 '''요시노조 시대'''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지만, 제2차 세계 대전 후 황국사관이 쇠퇴하면서 사어가 되었다. 현재 황통은 1392년 남북조 통일(메이토쿠 화약) 이후 북조이다.
1392년, 아시카가 요시미쓰 주선으로 대각사통과 지묘인통 양통 교대 통치, 전국 국가령을 대각사통 소유로 하는 조건으로 고카메야마 천황이 고코마쓰 천황에게 삼종신기를 넘겨 남북조가 통합되었다(메이토쿠 화약). 대승원일기목록은 “남북 합체, 일천 평안”이라 기록했다.
2. 1. 전사: 양통질립과 겐무 신정
1246년 고사가 천황의 퇴위 후,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황실이 다이가쿠지 계통과 지묘인 계통으로 분열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양 계통이 번갈아 천황을 배출하도록 중재했다.1333년 다이가쿠지 계통의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 타도를 위한 겐무의 난을 일으켰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닛타 요시사다 등의 활약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고다이고 천황의 친정인 겐무 신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과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무사 계급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나카센다이의 난 진압을 계기로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에 반기를 들었고, 닛타 요시사다와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이끄는 토벌군에 패배하여 규슈로 후퇴했다. 이후 세력을 회복한 다카우지는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승리하고, 고곤 상황의 명을 받아 교토로 진군했다.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닛타 요시사다와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패배하자,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과 화의를 맺고 삼종의 신기를 넘겨받아 고묘 천황을 옹립, 겐무식목을 제정하여 막부를 열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탈출하여 남조를 열고, "북조에 넘긴 신기는 가짜이며 고묘 천황의 황위는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호쿠리쿠와 규슈 등 각지에 자신의 황자를 보내 후위를 도모했다.
2. 2. 남북조 성립 (1336년)
가마쿠라 시대 말기인 1246년 고사가 천황의 퇴위 후, 천황가는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이가쿠지 계통(大覚寺統)과 지묘인 계통(持明院統)으로 분열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이 문제에 개입하여 양측이 번갈아 천황을 계승하도록 중재했다.1333년, 다이가쿠지 계통의 고다이고 천황은 전국 무사들에게 막부 타도 윤지를 내려 도막운동을 일으켰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닛타 요시사다 등이 이에 호응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고, 고다이고 천황의 친정, 즉 겐무 신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과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무사 계급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구 막부 세력이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키자, 다카우지는 천황의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난을 진압하고 친정에 반기를 들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닛타 요시사다와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에게 다카우지 토벌을 명했으나, 닛타 군은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패배했다. 다카우지는 이 기세를 몰아 교토로 진격했다.
하지만 오슈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와 구스노키 마사시게, 닛타 요시사다 군이 교토로 오면서 다카우지는 교토에서 밀려났다. 다카우지는 규슈로 가서 세력을 재정비한 후,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천황 측에 승리했다. 지묘인 계통의 고곤 상황의 명을 받아 교토로 진군한 다카우지는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닛타 요시사다와 구스노키 마사시게 군을 격파하고 히에이 산으로 몰아냈다.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과 화친하고 삼종의 신기를 넘겨받아 지묘인 계통의 고묘 천황을 옹립한 후, 건무식목을 제정하여 정책 방향을 정하고 정식으로 막부를 열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를 탈출하여 요시노로 피신, "북조에 넘긴 신기는 가짜이며 고묘 천황의 황위는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남조를 열었다. 호쿠리쿠와 규슈 등 각지에 자신의 황자를 파견하여 세력 회복을 도모했다.
남북조 시대 발발의 주요 원인은 1274년과 1281년의 몽골 침입 이후 호조 씨와 다른 무사 집단 간의 갈등 심화, 그리고 겐무 신정의 실패로 인한 황실 지지 세력과 아시카가 씨 지지 세력 간의 대립이었다.
2. 3. 간노의 소란과 남조 세력의 쇠퇴 (1350년대)
간노의 소란은 아시카가 다다요시와 고 모로나오 간의 권력 다툼으로 시작되었지만, 실제로는 토지 제도와 관료 조직 운영 방식에 대한 이견이 더 큰 원인이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혁신을 추구한 반면, 다다요시는 보수적인 정책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갈등은 막부의 지지 기반을 약화시켰고, 남조 세력에게 재기의 기회를 제공했다.[11][12][17]1351년 다카우지가 다다요시파에 대항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남조에 항복하면서, 정이대장군 직에서 해임되었다. 남조는 이 기회를 틈타 교토를 공격해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몰아내고 신기를 되찾았다. 요시아키라는 북조 연호를 부활시켜 교토를 탈환했지만, 남조는 퇴각하면서 고곤 천황, 고묘 천황, 스코 천황을 아노로 압송했다. 이 때문에 북조는 고코곤 천황을 신기 없이 즉위시키고, 다카우지를 정이대장군에 복귀시켰다.[4]
1352년 가마쿠라에서 다카우지를 겨냥한 남조의 공세는 다다요시의 이전 추종자들이 닛타 요시무네의 지지자가 된 덕분에 가능했다. 1353년 교토에 대한 남조의 공세는 슈고 다이묘 야마나 도키우지의 변절 덕분에 가능했다. 다다요시의 양자인 아시카가 다다후유는 1353년과 1354년 교토에 대한 남조의 공세 중 서군의 지휘관이 되었다.[18]
1354년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사망하면서 남조는 지도력을 잃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소카와 기요우지가 남조에 귀순하고 구스노키 마사노리와 함께 일시적으로 교토를 점거하기도 했지만, 1367년 패배 이후 남조의 대규모 공세는 사라졌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시대에는 오우치 히로요와 야마나 도키우지 등이 북조에 귀순했다. 요시아키라 사후,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보좌한 호소카와 요리유키는 구스노키 마사노리를 귀순시키는 등 막부 체제를 확립해 나갔다.[53]
2. 4. 규슈의 정세와 남북조 통합 (1392년)
규슈에서는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아시카가 측에 패한 기쿠치씨 등 남조 세력과,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남긴 잇시키 노리우지나 니키 요시나가 등의 세력이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남조는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인 가네나가 친왕을 정서장군으로 파견하여, 북조 세력과 공방을 되풀이했다. 간노의 소란이 일어나자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가세하여, 3세력이 대립하는 정립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1352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살해되자, 다다후유는 중국으로 떠났다. 1359년 지쿠고 강 전투(다이호하라 전투)에서는, 남조 측의 가네나가 친왕, 기쿠치 다케미쓰, 아카호시 무네쓰라, 우쓰노미야 사다히사, 구사노 나가유키 등과 북조 측의 쇼니 요리나오, 쇼니 나오스케 부자, 오토모 우지토키, 조이 후유쓰나 등 양군 합쳐 약 10만 명이 싸웠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패한 북조 측은 다자이후로 도망쳤고, 규슈는 이후 10년 정도 남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죽음을 계기로, 규슈의 남조 세력은 1368년 2월에 동정군을 일으켜 나가토・스오 방면으로 진군을 개시했지만, 오우치씨에 막혀 중단되었다.이 무렵, 조선반도와 중국 연안 등에서 왜구(전기 왜구)라고 불리는 해상 집단이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1372년 가네나가 친왕은 왜구 단속을 조건으로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 “양회(良懐)”로서 “일본국왕”이 되었지만, 무로마치 막부는 이마가와 사다요시(료슌)를 규슈로 파견하여 공세를 걸어 다자이후를 탈환했다.
남조 수장이자 남조 내부 평화파를 주도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셋째 아들 구스노키 마사노리는 여러 차례 북조·무로마치 막부에 평화를 제안했으나, 내외 방해로 번번이 실패했다.
1361년 제7차 교토 합전 이후, 양측은 전쟁에 지쳐 평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남조 고무라카미 천황은 평화파인 마사노리를 綸旨(린지)봉자로 임명하는 등 평화를 고려했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또한 문치파 시바 다카쓰네를 집사로 기용하는 등 온건 노선을 취했다. 1366년 조지의 변으로 시바 다카쓰네가 실각하지만, 요시아키라는 온건 노선을 유지했다.
1367년, 남조 측 평화 교섭 대표 도인 사네모리가 "북조가 남조에 투항한다"는 형식에 고집하여 협상이 결렬되고 전쟁 재개 직전까지 갔다.
고무라카미 천황은 구스노키 마사노리를 정식 남조 대표로 임명하고 우병위독이라는 고위 관직을 부여했다. 마사노리의 평화 교섭으로 요시아키라도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1367년 12월 7일 요시아키라가 사망하고, 1368년 3월 11일 고무라카미 천황이 서거하면서 평화 교섭은 무산되었다.
이후 메이토쿠의 화약에 의한 남북조 통일까지 25년 동안 평화 교섭은 없었다. 마사노리는 메이토쿠 화약 준비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통일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1368년 4월,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원복하였고, 우보시오야가 된 관령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실권을 장악하여 요시미쓰를 보좌하였다.
같은 해, 요리유키는 사찰본소령사(오안대법)를 발포, 막부 안정을 확립했다.
같은 해, 남조에서 강경파 조케이 천황이 즉위하자, 구스노키 마사노리는 고립되었다. 1369년, 요리유키는 마사노리를 귀순시켰다. 남조는 강경 노선으로 인재를 잃고 세력을 잃었고, 막부 측은 체제를 확립했다.
1373년, 요리유키는 호소카와 우지하루, 구스노키 마사노리, 아카마쓰 미쓰노리 등을 대장으로 아마노 전투에서 남조 중신 시조 다카토시를 전사시키고 아마노 행궁을 함락했다.
하시모토 마사토키 진압(하시모토 마사토키의 난) 실패, 시바 요시마사 등의 고발, 요시미쓰의 비판으로 1379년 고랴쿠의 정변으로 요리유키는 실각하였다.
호소카와 요리유키와 협력하여 북조·무로마치 막부 안정화를 도모한 인물은 연가를 완성한 니조 요시모토이다.
자체 무력이 없었던 북조는 막부 꼭두각시로 여겨지기 쉬우나, 장원 지배와 조정법 지식으로 권력과 권위를 가졌다. 요시모토는 요시미쓰를 지도하여 조정 문화를 전하고 공가 측으로 끌어들여 북조와 막부 일체화를 추진했다. 요시모토 책략으로 무가의 동량은 "가마쿠라도노"가 아닌 "무로마치도노"가 되었다.
고랴쿠의 정변으로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실각시킨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아시카가 쇼군가 중앙집권화를 진행, 막부 체제를 강화했다.
1392년 1월 23일 야마나씨를 토벌, 세력을 축소시켰다(메이토쿠의 난).
남조 쇠퇴,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슈고 다이묘 세력 삭감책으로 막부 중앙집권화가 진행, 세력 차이가 뚜렷했다.
1382년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남조에 귀참, 참의에 임명되지만, 같은 해 북조 야마나 우지키요에게 패퇴한다. 마사노리 참의 임명, 1383년 기타바타케 아키요시, 가네나가 친왕 사망, 조케이 천황이 고카메야마 천황에게 양위했다. 마사노리는 수년 내 사망, 무네요시 친왕도 1385년 사망, 구스노키 마사카쓰가 지휘관 지위를 계승했다. 1388년 히라오 전투에서 패배, 1392년 지하야 성 상실로 남조는 저항 수단을 잃었다.
다음과 같은 조건이 갖춰졌다.
# 고카메야마 천황 재위.
# 구스노키 마사노리, 기타바타케 아키요시, 가네나가 친왕, 무네요시 친왕 등 중추 인재 사망.
# 지하야 성 함락으로 군사력 상실.
1392년, 아시카가 요시미쓰 주선으로 다이가쿠지통과 지묘인통 양통 교대 통치, 전국 국가령을 다이가쿠지통 소유 조건으로 고카메야마 천황이 고코마쓰 천황에게 삼종신기를 넘겨 남북조가 통합되었다(메이토쿠의 화약). 대승원일기목록은 “남북 합체, 일천 평안”이라 기록했다.
남북조 합일로 이마가와 사다요시는 기쿠치 다케토모와 화목, 규슈도 막부 지배하에 들어갔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명으로부터 책봉되어 “일본 국왕”이 된다.
3. 남북조 시대의 의의
난보쿠초 시대는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여러 측면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공가 세력이 거의 완전히 무력화되고 무가 단독 정권이 성립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가마쿠라 막부와 조정이 권력을 나누어 가졌지만, 남조의 실패로 황실 등 구세력의 권위가 실추되었다. 북조의 공가도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해 경찰권, 민사 재판권, 상업 과세권 등을 빼앗기면서 무로마치 막부와 수호 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무가 지배 기구가 확립되었다.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이모작 보급 등으로 생산력이 향상되고 민중의 힘이 강해지면서, 혈연 중심 사회에서 지역 중심 사회로 변화하였다. 씨족 지배 대신 지역 지배가 중요해졌고, 국인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여 정치 동향을 좌우했다. 악당이라 불리는, 기존 세력에 반항적인 지역 조직도 나타났다. 쿠스노키 마사시게와 그의 아들 쿠스노키 마사쓰라의 등장은 이러한 사회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반제나 수호청이 일반화되면서 장원 영주는 수호의 출입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고, 무사들은 실질적인 영주로 변화해 갔다. 수호는 이러한 무사들과 주종 관계를 맺고 영내 지배권을 강화하여 '''수호 다이묘'''라 불리게 되었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대에 건축과 문화 양식이 성숙했으며, 궁중 문화와 연결되어 새로운 예술이 후원되었다. 무사들 사이에서도 우아한 기풍이 생겨났고, 연가 등이 유행했다. 한편으로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바사라나 니조가와라낙서와 같이 기존 세력에 대한 반항적이고 비판적인 풍조도 강해졌다.
19세기 이후 남조(南朝)의 천황들이 정통 천황으로 여겨져 왔다. 남조의 일본의 삼종신기 장악과 기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의 저서 『진노 쇼토키』는 그들의 정통성에 기여했다. 1911년 3월 3일 칙령으로 남조가 정통 재위 군주임이 확립되었다.[8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남조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나 현대 황실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87]
3. 1. 정치적 측면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서일본과 중부 일본 각지의 여러 성(省)에 분가 가족들을 수호(守護, ''shugo'')로 임명했다. 수호직에 임명된 아시카가 분가에는 호소카와 씨족, 야마나 씨족, 이마가와 씨족, 하타케야마 씨족, 니키 씨족, 키라 씨족, 시바 씨족, 이시도 씨족, 잇시키 씨족 등이 포함되었다.[19] 다카우지의 반란에 가담한 분가 당주이자 성공한 장군들이 수호직을 하사받는 경우가 많았다.[20]수호는 지방관 역할을 하며 중앙 정권과 지방 사이를 중재했다.[19] 이 시기 수호들은 가마쿠라 막부 시대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토지 분쟁 발생 시 사자를 파견하고, 법 집행을 하고, 반세(半稅, ''hanzei'')를 발행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21] 1372년 이후 수호들은 지주, 귀족, 무사들에게서 세금(田租, ''tansen'')을 징수할 책임을 맡았다. 수호들은 세금을 부풀려 이익을 챙겼다.[22]
사사키 씨족, 도가시 일족, 다케다 씨족, 오가사와라 씨족(중부 지방), 시마즈 씨족, 오토모 씨족, 쇼니 씨족(규슈) 등은 아시카가에 의해 대체되지 못했다.[24] 오우치 씨족(나가토), 시마즈 씨족(사쓰마) 등은 스스로 영주였기에 정권과 수호 직책에 대한 의존도가 낮았다.
1360년대 무로마치 막부는 저항 세력을 하나씩 제압했다. 관령 제도의 수립, 강력한 수호 가문의 막부 관료 조직 참여 증가, 궁중과의 긴밀한 관계는 막부의 정통성 기반을 확대했다.[53]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1379년 권력을 장악한 후 50년 동안 무로마치 막부는 일본의 최고 통치 기구로서 가장 강력한 시기를 맞이했다. 1380년대에 요시미쓰는 서부와 중부의 수호대(守護大名) 영주들을 교토에 거주하도록 하여 간레이(管領) 의회 제도를 강화했다.[56] 이는 쇼군이 수호대영주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수호대영주가 수도를 떠나는 것은 고문관 의회(Senior Vassal Council)의 논의 후에만 허가되었다.[57]
관동(関東)과 규슈(九州)의 수호대영주는 교토의 강제 거주 명령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의 가마쿠라(鎌倉) 본부는 관동 수호대영주들에 대해 유사한 정책을 시행하여, 교토에 저택을 마련하도록 했다.[58]
수호대영주들은 반역자로 낙인찍힐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에 이 문제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이 거주 정책으로 수호대영주들의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권력이 약화되었다. 15세기 중반부터 지방의 실질적인 권력은 수호대영주에서 수호대(守護大名) 대리(守護代)(슈고다이, shugo-dai)와 지방에 거주하는 독립적인 사무라이(국인)에게로 넘어갔다.[59]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의 지지자들은 30년 가까이 이어진 전투 끝에 우위를 점했다. 그는 권력 장악을 위해 다음 세 가지 주요 정책에 의존했다.
# 고케닌(御家人) 사무라이 가문과의 봉신 관계 강화
# 슈고(守護)를 바쿠후(幕府)의 지방 통치자이자 봉신으로 활용
# 토지의 반세(半稅) 정책(반감세)
반세 정책은 사무라이의 쇼엔(荘園) 침입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쇼엔 제도의 생존을 보장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사무라이 관리인(지토(地頭))과 가마쿠라 막부(1185~1333) 사이의 봉신 관계가 중간적인 성격을 띠었다.[78]
반세 정책은 전시에 군량(兵粮調所)으로 지정된 긴급 세금으로 시작되었다. 미노(尾張国), 오미(近江国), 오와리(尾張国)의 사찰, 신사 및 영지의 소득 절반이 무로마치 막부 군대 지원에 사용되었다. 이는 다카우지에 의해 점차 재해석 및 변경되어, 토지의 절반을 영구적으로 획득하여 가신들에게 봉토(封土)를 부여하는 데 사용되었다.[81]
남북조 시대의 의의는 상부구조의 관점에서 공가 세력의 거의 완전한 무력화와 무가 단독 정권의 성립이다. 가마쿠라 시대는 가마쿠라 막부와 조정의 공무 이중 권력이었고, 공가도 장원·공령을 통해 일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조의 실패로 황실 등 구세력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북조의 공가도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해 경찰권, 민사 재판권, 상업 과세권 등을 차례로 찬탈당했다.
3. 2. 사회·경제적 측면
무사들의 약탈에도 불구하고 영지 제도가 유지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로마치 막부의 존재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반세법(半税法)을 통해 무사들의 침입을 막으려 했다.[28] 그러나 귀족의 영지와 수입을 빼앗는 수호 계약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무로마치 정부는 무사들이 귀족에게 수입의 일부를 지불하도록 했다.다른 이유는 귀족 계급의 정통성 때문이다. 무사들의 등장은 농민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귀족들의 온화한 통치를 백성들은 존중했다. 농민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수호와 고쿠진은 영지 구조의 외형을 존중했다.[35]
14세기 후반과 15세기 후반 교토는 활발한 경제 활동의 중심지였다.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의 강제 거주 정책으로 수호(守護) 다이묘와 가신들이 도시에 거주하면서 경제 성장을 촉진했다. 쇼군과 수호 다이묘는 사금업자(借家土豪)들의 부를 이용했고, 쇼군은 그들을 세금 징수원으로 고용하기도 했다.[72] 무로마치 막부는 상업세에서 수입의 상당 부분을 얻었다는 점에서 가마쿠라 막부와 달랐다.
무로마치 막부의 관청(政所)은 수입 관련 사항을 처리하는 주요 기관이었다. 1393년 막부는 사금업자에게 직접 세금을 부과할 권리를 합법화했다.[73] 교토에 부과된 상업세는 무로마치 막부의 새로운 기반이 되었고, 막부의 성격을 토지 소유에서 상업 기반으로 바꾸었다.
전통적인 농업 기반 수입은 쇼군령, 쇼군의 가신, 수호(守護) 다이묘에게 부과된 세금에서 나왔다. 아시카가 쇼군의 토지 기반은 에도 막부에 비해 미미했지만, 교토와 간토(関東) 지방 사이에 약 200개의 쇼군령(御料所)이 있었고, 이들 영지에서 징수된 수입은 상당했다.[74] 쇼군령과 쇼군군의 관계는 중요했으며, 군에 복무한 사람들 중 일부는 쇼군의 사유지 관리자이기도 했다.[75] 지방 사무라이들은 고케닌(御家人)으로서 막부에 지방세(公済)를 납부하여 수호(守護)의 세금 징수원으로부터 면제되었다.[76] 수호(守護) 다이묘는 관리하는 지방의 수에 따라 직접 세금(守護出捐)을 부과받았다.[77]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수입원은 교토와 야마시로국의 시장 경제로 인해 가마쿠라 막부보다 다양했다. 사금업자로부터 징수한 상업 수입은 무로마치 관료제의 권력 구조가 교토를 장악한 후 세금이 부과되면서 나타났다.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는 국가령이나 장원 중 천황가·공가·사찰의 영지는 무가의 지배가 미치지 않았다. 鎌倉 시대를 통해 무가의 통치 기구인 수호·지두에 속하는 무사가 지두청이나 하지중분이라는 형태로 국가령이나 장원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난보쿠초 시대에 들어서면서 두드러지게 되었고, 장원의 연공의 절반을 막부에 바치는 반제나 연공의 거두는 것을 수호가 맡는 수호청이 일반화되었다. 또한, 鎌倉 시대 수호의 권한이었던 대범삼개조(대번촉진, 모반인·살해자의 검단)에 더하여 결전랑척의 단속도 수호의 역무가 되어, 장원 영주는 수호의 출입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토지 지배 상 무사의 입장은 장관·하사로서 장원 영주를 대신하여 장원을 관리하는 것에 그치는 입장에서 실질적인 영주로 변화해 갔다. 수호는 이러한 무사와 주종 관계를 맺게 되고, 영내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여 '''수호 다이묘'''라 불리게 되었다. 남북조 통일기에 국가령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장원공령제가 완전히 붕괴하는 것은 남북조 시대보다 2세기 후의 태합검지에 의해서이지만, 이 남북조 시대에 이미 큰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전란으로 인해 공가와 조정의 정치력이 약해지고, 정치의 주도권은 완전히 무가로 넘어가게 되었다. 또한, 무가 사회에서도 그동안 당연했던 전국에 분산된 소령의 지배가 어려워지면서, 분산된 소령을 매각·교환하여 한 곳에 모으는 소령의 일원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에 따라 간토의 좁은 "묘자의 땅"에서 신은의 넓은 지방으로 이주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3. 3. 문화적 측면
아시카가 요시미쓰(재위 1379~1408)는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관령직에서 물러난 후 권력을 장악했으며, 이후 일본 문화를 특징짓는 건축과 문화 양식이 성숙하는 것을 보았다.[54] 그는 궁중과 그 문화와 긴밀히 연결되어 새로운 예술을 후원함으로써 이 문화를 무가 귀족과 수호 다이묘에게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55] 쇼군과 궁중의 이러한 연결은 두 기관 모두에 명성을 더했고, 쇼군에게는 이전 가마쿠라 막부가 결여되어 있었고 무사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문민적인 정통성과 문화의 분위기를 부여했다.남북조 시대의 의의는 상부구조의 관점에서 보면, 공가 세력의 거의 완전한 무력화와 무가 단독 정권의 성립이다. 가마쿠라 시대는 가마쿠라 막부와 조정의 공무 이중 권력이었고, 공가도 장원·공령을 통해 일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천황 친정을 내세운 남조의 실패로 황실 등 구세력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북조의 공가도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해 경찰권·민사 재판권·상업 과세권 등을 차례로 빼앗겼다. 남북조가 통일되었을 때, 남은 승자는 남조도 북조도 아니고, 아시카가 쇼군가를 중심으로 하는 무로마치 막부와 수호 체제에 의한 강력한 무가의 지배 기구였다.
한편, 남북조 시대의 의의를 하부구조에서 보면, 이모작의 보급 등으로 생산력이 향상되고 민중의 힘이 증가함에 따라, 그때까지의 일본 사회는 혈통과 혼인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던 것에 반해, 이 시대에 「총」(마을), 즉 지역으로 맺어지게 된 데 있다. 씨족의 지배가 아니라 지역의 지배가 중요해진 것이다. 전란이 60년 가까운 장기간에 걸친 것도 이 사회 구조의 변화가 기본적인 요인이다. 이렇게 지역을 단위로 한 새로운 세력은 「국인」이라고 불리며, 남북조의 내란을 계기로 등장하여, 뒤에는 국인층에 대한 우대 정책을 내세운 무로마치 막부에 붙는 등, 대세력의 정치 동향을 좌우했다. 남북조 사회를 이끈 것은 바사라 다이묘(구래의 권위를 무시하는 무사)와 더불어, 하부구조에서 출현한 「악당」(악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구세력에 반항적인 지역 조직이라는 의미)이었다. 가와치의 한 악당에 불과했던 쿠스노키 마사시게가 남조에 유력 무장으로 등용되어 『태평기』에서 영웅으로 그려지고, 그의 아들 쿠스노키 마사쓰라도 공경인 참의에까지 오른 것은 그 단적인 상징이다.
연가 등의 유행도 있어 무사들 사이에서도 우아한 기풍이 생겨나고 있었다. 정치적 혼란이 큰 시대였기에 바사라나 니조가와라낙서와 같이 기존 세력에 대한 반항이나 비판적인 풍조가 강해졌다.
4. 남북조 시대의 주요 인물
다카우지가 장악한 무장 기구와 다다요시가 장악한 관료 사법 기구 간의 분리와 충돌은 간노의 변을 발생시켰다.[37]
관령 제도의 등장으로 무사들을 대표하는 수호 대명들은 관료 체제에 묶이게 되었다.[38] 관령은 중신회의와 쇼군 사이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38] 또한 관료적 요소들을 감독하고, 쇼군의 명령을 의회와 관료들에게 전달하는 책임을 맡았다. 정책은 의회와 쇼군 간의 협의를 통해 수립되었지만, 최종 결정은 쇼군이 내렸다.[39]
관령은 다카우지와 4대 안에 연관된 세 수호 가문(호소카와, 하타케야마, 시바)에서 세습적으로 선출되었다.[40] 이들은 번갈아 가며 관령직을 수행했다. 초기 의회는 이 세 수호 가문의 수장들과 다른 네 명의 강력한 수호 가문 수장들(야마나, 이시키, 아카마쓰, 교고쿠)로 구성되었다.[40] 이후 오우치, 사사키, 토키 가문 등이 영입되면서 혈연 관계에 관계없이 강력한 수호 가문들이 체제에 묶였다.
무사도코로는 14세기에 이마가와, 호소카와, 하타케야마, 시바, 토키 중에서 선출된 중신회의 구성원이 이끌었다.[13] 무사도코로는 교토에서 치안 유지와 형사 사법 집행을 담당했다.[13] 직책을 맡은 자는 야마시로 지방의 수호가 되었으며, 정권 본부와 교토를 보호할 책임을 맡았다.[41] 15세기 초에는 무사도코로의 수장이 야마나, 아카마쓰, 교고쿠, 이시키 네 수호 가문 중에서 선출되었다.
수호가 중신회의와 무사도코로에 참여한 것은 아시카가 쇼군들이 이들을 통해 국가를 중앙집권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령 관계라는 혈연 관계도 중요한 모집 메커니즘으로 작용했고, 수호 대명들은 대부분 아시카가의 분가였다. 그러나 관령 의회 제도를 통해 수호 대명들이 통치에 참여함으로써 더욱 굳게 정권에 묶이게 되었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계승하여 구스노키 씨의 당주가 된 남조의 무장 구스노키 마사유키는 1347년, 후지이데라 전투와 텐노지·스미요시 전투에서 막부의 유력 무장 호소카와 아키우지와 야마나 도키우지를 격파했다. 하지만 상황을 심각하게 본 막부 집사 고노 모로나오는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여 1348년 1월 5일(음력), 시조나와테 전투에서 마사유키와 그의 동생 구스노키 마사토키 형제를 전사하게 만들었다.
1351년, 다카우지는 나오요시파에 대항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남조에 항복했다. 연호를 남조의 "정평"으로 통일하는 "정평일통"이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다카우지는 정이대장군에서 해임되었다. 다카우지는 1351년 12월 삿타 고개 전투에서 아우 나오요시를 무찌르고, 아시카가 당을 통일했다. 나오요시는 이듬해 2월 26일(구력) 급사했다. 나오요시의 양자이자 후계자이며, 다카우지의 아들이기도 한 아시카가 나오후유는 이후에도 남조와 연계하여 무로마치 막부・북조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간노의 난 이후 남북조는 네 차례에 걸친 교토 전투를 벌였지만, 승패가 나지 않고 서로 쇠약해졌다. 1352년 직의가 죽은 후, 정평 통일 정권(구 남조)은 교토로 진격하여,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적자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몰아내고 교토를 점령, 신기까지 빼앗았다(제4차 교토 전투(하치만 전투)). 요시아키라는 북조 연호를 부활시켜 다시 교토를 탈환했지만, 남조는 후퇴하면서 고광, 광명 두 상황과 퇴위 직후의 스미카타 상황(고광의 황자)을 가나생으로 데려갔다. 이 때문에 북조는 고광의 황자이자 스미카타의 동생인 고코곤 천황을 신기 없이 즉위시켰고, 공무의 관위를 복구시켰으며, 다카우지도 정이대장군에 복귀했다.
구 직의당을 흡수한 남조는 재기하여, 1352년 8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 말까지 셋쓰 전투에서 막부군을 격파했다. 이 기세를 몰아 1353년 6월 9일, 남조는 제5차 교토 전투에서 교토를 탈환했다. 그러나 막부의 대공세를 받아 7월 24일 교토를 포기했다.
1354년, 남조의 실질적 지도자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사망했다. 그러나 아시카가 나오후유가 남조에 합류하면서 다시 무력을 회복하여, 1355년 2월, 나오후유와 구스노키 마사요시는 제6차 교토 전투(신난 전투)에서 교토를 일시 점령했다. 그러나 동국에서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압박해오자 남조는 다시 교토를 포기했다.
1358년 4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죽자 신다 요시사다의 아들 니타 요시무네 등이 재기하려 했지만, 조직적인 봉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무로마치 막부의 새로운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는 남조 소탕의 대공세에 나섰으나, 구스노키 마사요시는 전투를 산악전으로 끌고 가 장기화시켰다. 이로 인해 막부 측은 유력 무장들이 잇달아 반기를 들었고, 막부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1361년, 막부 내의 항쟁에서 실각한 호소카와 기요우지는 남조에 귀순하여, 구스노키 마사요시 등과 연합하여 제7차 교토 전투에서 일시적으로 교토를 점령했다. 그러나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탈환되었고, 남조는 열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시대에는 오우치 히로요나 야마나 도키우지 등도 무로마치 막부에 귀복했다.
1368년 4월, 어린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원복하였고, 그의 우보시오야가 된 무로마치 막부 관령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실권을 장악하여 요시미쓰를 보좌하였다. 같은 해, 요리유키는 사찰본소령사(일명 "'''오안대법'''")를 발포하였고, 이후에도 뛰어난 내정 수완으로 막부의 안정을 확립해 나갔다.
북조의 역대 천황은 다음과 같다.
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
1 | 광엄 천황 | 1331–1333 |
2 | 광명 천황 | 1336–1348 |
3 | 숭광 천황 | 1348–1351 |
혼란기 | 1351년 11월 26일 ~ 1352년 9월 25일 | |
4 | 후광엄 천황 | 1352–1371 |
5 | 후엔유 천황 | 1371–1382 |
4. 1. 남조
1362년, 남조는 마지막으로 교토를 공격했지만, 아시카가 군의 반격으로 실패했다.[43] 1350년대의 활기는 사라지고, 이후 저항은 산발적이고 수비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1369년, 고무라카미 천황이 사망하고 1년 뒤, 남조의 장군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항복하면서 중앙 영지에 대한 위협은 사라졌다.[43]19세기 이후, 남조의 천황들은 정통 천황으로 인정받았다. 남조가 일본의 삼종신기를 장악하고,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진노 쇼토키』를 저술하여 남조의 정통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1911년 3월 3일, 국가 신도의 영향으로 내려진 칙령은 남조를 정통 왕조로 확립했다.[8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구마자와 히로미치를 비롯한 사람들이 남조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북조 계승의 현대 황실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했다.[87]
남조의 역대 천황은 다음과 같다.
- 고다이고 천황(1288–1339, 재위 1318–1339)
- 고무라카미 천황(1328–1368, 재위 1339–1368)
- 조케이 천황(1343–1394, 재위 1368–1383)
- 고카메야마 천황(1347–1424, 재위 1383–1392)
연호 | 북조 | 남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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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 2년(1318년) | 96고다이고 천황(1318-1331) | |
겐표 원년(1331년) | 북1광엄 천황(1331-1333) | |
쇼케이 2년/겐표 3년(1333년) | 96고다이고 천황(1333-1336) | |
겐무 3년/엔겐 원년(1336년) 8월 15일 | 북2광명 천황(1336-1348) | |
겐무 3년/엔겐 원년(1337년) 12월 21일 | 남1(96)고다이고 천황(1337-1339) | |
랴쿠오 2년/ 엔겐 4년(1339년) | 남2(97)고무라카미 천황(1339-1368) | |
데이와 4년/쇼헤이 3년(1348년) 10월 27일 | 북3스코 천황(1348-1351) | |
간노 2년/쇼헤이 6년(1351년) | ||
간노 3년/쇼헤이 7년(1352년) | 북4고코겐 천황(1352-1371) | |
오안 원년/쇼헤이 23년(1368년) | 남3(98)조케이 천황(1368-1383) | |
오안 4년/겐토쿠 2년(1371년) | 북5고엔유 천황(1371-1382) | |
에이토쿠 2년/고와 2년(1382년) | 북6고코마쓰 천황(1382-1392) | |
에이토쿠 3년/고와 3년(1383년) | 남4(99)고카메야마 천황(1383-1392) | |
메이토쿠 3년/겐추 9년(1392년) | 100고코마쓰 천황(1392-1412) |
1337년, 남조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고다이고 천황과 아버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요청으로 가마쿠라를 함락시키고, 미노 국에서 막부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호쿠리쿠의 닛타 요시사다와 연계하지 못하고, 이세로 우회했으나 군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결국 1338년, 아키이에는 이시즈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
남조의 닛타 요시사다는 겐무의 난 말기부터 호쿠리쿠 지방에서 고군분투했으나, 1338년 후지시마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 이로써 남조는 군사적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1339년, 고다이고 천황이 사망하고, 아들 노리요시 친왕이 고무라카미 천황으로 즉위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을 기리기 위해 텐류사를 건립했다.
같은 해,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남조 세력 결집을 위해 오다 성에서 농성하며 『진노 쇼토키』를 집필, 남조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유학을 도입하여 혁신적인 사상을 전개했다. 1343년경, 지카후사는 고무라카미 천황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며 준삼궁의 지위를 얻었다.
관응의 난 이후, 남북조는 네 차례의 교토 전투를 벌였지만 승패 없이 쇠약해졌다. 남조는 교토를 점령하고 신기를 탈취하기도 했지만, 북조는 고코겐 천황을 즉위시키고 공무 관위를 복구하며 반격했다.
1352년부터 남조는 여러 차례 교토를 탈환했지만, 막부의 반격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1354년,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사망하며 남조는 지도자를 잃었지만, 아시카가 나오후유가 남조에 합류하며 다시 세력을 회복, 교토를 일시 점령하기도 했다.
1358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사망하고, 닛타 요시사다의 아들 닛타 요시무네 등이 재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무로마치 막부의 새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는 남조를 공격했지만, 산악전으로 장기화되면서 막부 내 반란이 발생, 세력이 약화되었다.
1361년, 막부 내 항쟁에서 실각한 호소카와 기요우지가 남조와 연합하여 교토를 일시 점령했지만, 곧 탈환당하며 남조는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시대에는 오우치 히로요 등도 무로마치 막부에 귀순했다.
규슈에서는 기쿠치 씨 등 남조 세력과 북조 세력이 대립했다. 남조는 가네나가 친왕을 파견하고, 관응의 난 이후 아시카가 나오후유가 가세하며 3파전이 벌어졌다. 1352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살해되고 나오후유는 중국으로 떠났다. 1359년 지쿠고가와 전투에서 남조가 승리하며 규슈를 10년 정도 지배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사후, 규슈 남조 세력은 진군을 시도했지만 오우치 씨에게 저지당했다.
이 무렵, 왜구가 활동하기 시작했고, 1372년 가네나가 친왕은 왜구 단속을 조건으로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 “일본 국왕”이 되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는 이마가와 사다요를 파견하여 다자이후를 탈환했다.
남조의 지도자 구스노키 마사노리는 여러 차례 평화를 제안했지만 실패했다. 1361년 이후, 양측은 전쟁에 지쳐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고무라카미 천황과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는 온건 노선을 취했지만, 1367년 협상이 결렬될 뻔했다.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남조 대표로 임명되어 평화 교섭이 재개되었지만, 1367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라가 사망하고, 1368년 고무라카미 천황이 사망하며 평화 교섭은 무산되었다. 이후 메이토쿠 화약까지 25년간 평화 교섭은 재개되지 않았다.
4. 2. 북조 및 무로마치 막부
헤이안 시대에는 공용지(국가령)와 사유지인 쇼엔(荘園)이 구분되었는데, 쇼엔은 국가 과세에서 면제되었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러나 공용지는 사유지와 거의 차이가 없었고, 둘 다 부재지주가 소유했다. 행정적인 측면에서 사유지는 귀족 관리들이 직접 관리했지만, 공용지는 국가 관리(국가(国衙) 또는 국사(国司))가 관리했다.[29]가마쿠라 시대에는 공용지가 사유지(지교(知行))로서 여러 지주에게 소유되었고, 여기에는 귀족 가문, 종교 시설, 무사 등이 포함되었다. 특히 간토(関東)와 동북 지역은 무사들이 사유지로 소유했다.[30] 간토 지방은 가마쿠라 막부에 사유지(지교국(知行国))로 하사되었고, 아시카가 막부는 이 토지를 상속받아 수호를 배치했다.[29]
국사(国司)는 각 지방의 형사 사법 감독과 공용지(국가령) 내 사유지 유지를 담당했지만, 가마쿠라 막부의 등장과 함께 그 기능이 변화했다.[31] 가마쿠라 막부가 수호를 임명하면서 각 지방의 형사 재판권은 수호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국사는 율령(律令) 행정의 핵심 관리로서 교토와 야마시로(山城) 국의 부재지주인 귀족과 사찰(사찰본정(寺社本所))에 사유지의 지대가 전달되도록 했다.
난보쿠초 시대의 전쟁으로 율령 행정이 붕괴되면서, 가마쿠라 시대에 지방 통치에서 작은 역할을 했던 수호는 국사의 기능을 빼앗기 시작했다. 수호는 공용지 내 사유지 감독을 맡으면서 귀족, 무사(고쿠진(国人), 지자무라(地侍)), 종교 시설 등 다양한 지주들과 관계를 맺었다. 이들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봉토를 주고, 군사 봉사 대신 기존 무사의 토지를 재확인했으며, 귀족과 수호 계약을 체결했다.[30] 공용지에 대한 봉신 관계는 수호의 권력을 증대시키는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1346년, 무로마치 막부는 수호에게 영지의 도둑맞은 곡물 사건을 판결하고 황실군으로부터 받은 유능한 신하들에게 토지를 임시로 할당할 권리를 부여했다.[32] 이는 가마쿠라 막부의 전통적인 관할권이 무로마치 막부에 의해 "포기"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전에는 곡물 도난이나 토지 할당 사건은 가마쿠라 막부의 관할이었다. 황실군이 패배하면서 적의 토지가 몰수되고 재할당될 가능성이 열렸고, 이러한 새로운 관할권을 수호에게 부여함으로써 지방 통치자로서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간노의 변은 다카우지가 장악한 무장(vassal) 기구와 다다요시가 장악한 관료 사법 기구 간의 분리와 충돌로 인해 발생했다.[37]
관령(kanrei) 의회 제도의 등장으로 무사들을 대표하는 수호(shugo) 대명들은 관료 체제에 묶이게 되었다.[38] 관령은 중신회의(jushin kaigi)와 쇼군(shōgun) 사이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38] 관령은 체제의 관료적 요소들을 감독하고, 쇼군의 명령을 의회와 관료들에게 전달했다. 정책은 의회와 쇼군 간의 협의를 통해 수립되었지만, 최종 결정은 쇼군이 내렸다.[39]
관령은 다카우지와 4대 안에 연관된 세 수호 가문(호소카와, 하타케야마, 시바)에서 세습적으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번갈아 가며 관령직을 수행했다. 초기 의회는 이 세 수호 가문의 수장들과 다른 네 명의 강력한 수호 가문 수장들(야마나, 이시키, 아카마쓰, 교고쿠)로 구성되었다.[40] 이후 오우치, 사사키, 토키 가문 등이 영입되면서 혈연 관계에 관계없이 강력한 수호 가문들이 체제에 묶였다.
무사도코로는 14세기에 이마가와, 호소카와, 하타케야마, 시바, 토키 중에서 선출된 중신회의 구성원이 이끌었다. 무사도코로는 교토에서 치안 유지와 형사 사법 집행을 담당했다.[13] 직책을 맡은 자는 야마시로 지방의 수호가 되었으며, 정권 본부와 교토를 보호할 책임을 맡았다.[41] 15세기 초에는 무사도코로의 수장이 야마나, 아카마쓰, 교고쿠, 이시키 네 수호 가문 중에서 선출되었다.
수호가 중신회의와 무사도코로에 참여한 것은 아시카가 쇼군들이 이들을 통해 국가를 중앙집권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령(soryo) 관계라는 혈연 관계도 중요한 모집 메커니즘으로 작용했고, 수호 대명들은 대부분 아시카가의 분가였다. 그러나 관령 의회 제도를 통해 수호 대명들이 통치에 참여함으로써 더욱 굳게 정권에 묶이게 되었다.
1370년, 이마가와 사다요(료슌)는 규슈 남조 저항의 마지막 거점을 무너뜨리라는 임무를 받았다. 1381년 기쿠치 씨의 패배로 제국 저항이 무너졌고, 1385년 시마즈 우지히사의 죽음과 함께 규슈의 마지막 영지가 아시카가 정권에 충성을 선언했다.[44]
1367년 이후, 쇼군 요시미쓰의 섭정 시대 동안 관령 요리유키는 귀족들의 관점에서 정권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젊은 쇼군을 고대의 궁정 서열 제도에 참여시킴으로써 권위를 확보했다.[45] 또한 이전의 어떤 무장 지도자보다도 훨씬 더 밀접하게 정권을 궁정과 연관시켰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황권 복고에 맞서 싸운 반역자로 여겨졌지만, 요리유키는 정권을 궁중에 연결시켜 남북조 시대 갈등을 부추긴 이데올로기의 오명을 지웠다.
궁중 사회는 일본 사회의 여러 계층에서 인기가 있었고, 영지 차원에서 농민들은 무사보다 귀족에게 더 가까이 느꼈다. 요리유키가 젊은 쇼군을 궁중 의식에 참여시킨 이유는 귀족들이 무사들이 가지지 못한 전통의 정당성과 문화적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참여는 황실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무사 정권과 궁정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켰으며, 무사 계급 사이에 궁정 문화가 확산되는 효과를 가져왔다.[46]
관령 요리유키는 1368년 마지막 반세 조례를 공포했다. 이 조례는 귀족들의 이익을 정권에 묶어 두었고, 황실과 황족 섭정이 소유한 토지의 절반 감축을 금지했다. 예외는 이전 쇼군이 완전한 소유권을 부여한 귀족 토지와 사무라이 관리(地頭, jitō)가 관리하는 영지였다.[47] 이 조례는 전국 모든 영지에 적용되어 사무라이의 영지 침입을 억제하고 귀족들의 이익을 보호했다.
이미 일어난 사무라이의 침입은 되돌릴 수 없었다. 1368년 조례에도 불구하고 사무라이와 슈고 다이묘들의 영지 침입은 심각했다. 15세기가 되면서 이러한 토지 탈취는 더욱 두드러졌다. 비효율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368년 조례는 귀족의 이익을 인정했고, 무사 정권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옹호되었으며, 양측의 이익을 하나로 묶었다.
1360년대에 등장한 무로마치 정권의 직접 통치는 서부 및 중부 지방으로 제한되었다. 다케다 씨, 지바 씨, 유키 씨, 사타케 씨, 오야마, 우쓰노미야, 쇼니 씨, 오토모 씨, 아소, 시마즈 씨 가문 등은 간토와 규슈 지역 또는 그 근처에 집중되어 있었고, 관령 회의 제도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정권으로부터 반독립적인 상태였다.[48]
요시미쓰(재위 1379~1408)는 요리유키가 관령직에서 물러난 후 권력을 장악했으며, 건축과 문화 양식이 성숙하는 것을 보았다.[54] 그는 궁중과 그 문화와 긴밀히 연결되어 새로운 예술을 후원함으로써 이 문화를 무가 귀족과 수호 대명에게 전파했다.[55] 쇼군과 궁중의 연결은 두 기관 모두에 명성을 더했고, 쇼군에게는 문민적인 정통성과 문화의 분위기를 부여했다.
1380년대에 요시미쓰는 서부와 중부의 수호대명 영주들을 교토에 거주하도록 설득하여 간레이 의회 제도를 강화했다. 1389년에는 오우치 요시히로를 직접 방문하여 교토에 머물도록 설득했다.[56] 이 정책은 쇼군이 수호대명 영주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수 있게 했다. 지방 반란이나 남조 게릴라 활동의 경우 허가가 내려지더라도 적절한 인질이 교토에 남겨졌다. 수호대명 영주가 허가 없이 떠난다면 반역으로 간주되었다.[57]
관동과 규슈의 수호대명은 교토의 강제 거주 명령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의 가마쿠라 본부는 관동 수호대명 영주들에 대해서도 유사한 정책을 시행하여 가마쿠라에 저택을 마련하도록 했다.[58]
수호대명 영주들은 반역자로 낙인찍힐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거주 정책으로 수호대명 영주들의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그들의 권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15세기 중반부터는 지방의 실질적인 권력이 수호대명 영주들로부터 수호대명 대리(슈고다이)와 지방에 거주하는 독립적인 사무라이(국인)들에게로 넘어갔다. 따라서 이 정책은 수호대명 영주들에게 장기적인 재앙이었다.[59]
요시미쓰는 수호 대명들이 너무 강해졌다는 구실을 내세워 군사력을 사용하여 그들을 복종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5개 부대로 구성된 총 3,000명에 달하는 새로운 막부군(합반주)을 조직했다.[60] 이 군대는 특히 다른 수호 대명들의 지원을 받았을 때 막강한 전력이었다. 막부군은 쇼군을 그의 직속 가신들과 직접 연결했으며, 고쿠진 사무라이들로도 구성되었다. 막부군은 또한 수호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막부군은 두 가지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아시카가 분가 구성원, 수호 친족 및 수호 분가 구성원, 정권 관리들의 다른 아들들과 형제들, 그리고 강력한 고쿠진으로 구성된 쇼군의 호위대(신에이군)였다. 최대 350명으로 구성된 이 집단은 결속력 있고 충성스러운 집단이었다.[61] 이 소규모 부대 주변에는 쇼군의 직속 가신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예비군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62]
쇼군의 군대만으로는 전장에서 관령급 수호 대명들을 물리칠 수 없었지만, 요시미쓰가 행한 전쟁 방식에는 완벽하게 적합했다. 요시미쓰는 한 수호 대명을 그의 가족 구성원이나 다른 수호 대명들과 대립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비공식적으로 쇼군의 권위는 어떤 수호 대명도 쇼군의 분노를 사지 않고서는 특정한 권력 수준을 넘어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64]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1389년 요시미쓰는 도키 야스유키에게 오와리국을 친척에게 양보할 것을 명령했다. 야스유키가 거부하자 요시미쓰는 야스유키의 사촌인 도키 요리마스에게 그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3년 후 야스유키는 패배했고, 1391년 미노국은 요리마스에게 주어졌다.[65]
명덕의 난(1391년) 이전에, 야마나 씨는 서일본과 중부 일본에서 11개국을 소유하여 당시 가장 강력한 수호 가문이었다. 요시미쓰는 그들을 공격할 구실을 찾았고, 야마나 미츠유키가 이즈모에 있는 궁가의 영지를 점유하자, 요시미쓰는 전 관령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소환하여 미츠유키를 치는 작전을 계획하게 했다.[66] 야마나 씨의 수호 대명 미츠유키와 우지키요는 교토를 공격했지만, 쇼군군과 오우치 요시히로의 군대의 합동 공격으로 크게 패했다.[67] 전투 후, 야마나 씨는 다지마국과 호키국 2개국만 할당받았고, 우지키요는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미츠유키는 1395년 암살당했다.[66]
한 수호 대명을 다른 수호 대명과 대립시키는 이러한 방식은 1399년에 정점에 달했다. 역설적으로 이번 표적은 야마나 씨 토벌 작전에서 정권에 큰 공을 세웠던 오우치 요시히로였다. 요시히로는 1397년 쇼니 씨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그의 형제를 잃었다. 그는 나중에 요시미츠의 이중적인 속임수를 알게 되었다. 쇼니 씨 또한 오우치 씨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행위에 분노하고, 쇼군이 그를 교토로 소환했을 때 자신의 목숨을 걱정한 그는 명령을 거부했다.[69] 이로 인해 그는 정권의 적이 되었다. 사카이 전투에서 요시미츠는 호소카와 씨, 아카마쓰 씨, 교고쿠 씨, 시바 씨, 하타케야마 씨 등 5개 수호 대명의 군대와 함께 도시에 불을 질러 요시히로의 방어 시설을 압도했다.[70] 요시미츠가 이끈 연합군은 3만 명에 달했고, 오우치 씨는 5천 명이었기에 요시히로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결했다.[71]
쇼군은 수호 대명들을 서로 공격하고 파괴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분열시키는 데 자신의 패권을 사용했다. 그러나 쇼군군과 정권의 다른 경비를 지원할 재정이 없었다면, 이러한 강압적인 정책은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쇼군의 패권은 수호 대명들이 쇼군군과 힘을 합치는 데 협력하지 않았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의 지지자들이 우위를 점하기 전까지 양측 간의 치열한 전투는 거의 3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세 가지 주요 정책에 의존했다.
- 고케닌(御家人) 사무라이 가문과의 봉신 관계 강화
- 슈고(守護)를 바쿠후(幕府)의 지방 통치자이자 봉신으로 활용
- 토지의 반세 정책(반감세)
사무라이와의 봉신 관계와 슈고에 대한 통제는 1350년대에 정권이 안정된 후에야 확립되었다. 이 두 계층 구조는 쇼군의 권력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연결 고리였다.
반세 정책은 사무라이가 쇼엔(荘園)에 침입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쇼엔 제도의 생존을 보장했다.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면서 쇼군과 그 가신들 간의 종속 관계는 라이벌에 대한 군사 행동의 필요성으로 인해 강화되었다. 비교적 평화로운 가마쿠라 시대에는 내전 발발 당시만큼 무술 능력이 중요하지 않았다.[82] 가신 관계를 강화하지 않으면 아시카가 씨에 충성하는 신흥 수호 영주에게 잠재적인 무사를 잃을 위험이 있었고, 더 나쁜 경우에는 라이벌 천황파 장군에게 빼앗길 위험도 있었다. 이러한 종속 관계는 무사 모집을 통해 잠재적인 갈등을 해소하는 데 활용되었다.
몇몇 사건들은 이러한 종속 관계의 변화하는 분위기를 보여준다. 고바야카와 가문은 1336년 다카우지가 규슈로 후퇴한 후 아키 국에서 아시카가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충성스러운 가신이 되었다.[83] 모리 가문은 1336년 다카우지의 가신이 되어 간노의 변이 발발할 때까지 고 모로야스 휘하에서 봉사했다. 1350년대에 모리 가문은 다카우지의 적(다다요시와 그의 양자 다다후유)과 손을 잡았고, 1360년대가 되어서야 다시 쇼군의 가신이 되었다.[84] 1336년 여름 다카우지가 수도를 탈환하려는 과정에서 교토 근처의 가와시마 가문과 다른 무사 가문과의 종속 관계가 수립되었다. 가와시마 가문은 군사 봉사를 대가로 가와시마 영지의 절반 이상에 대한 지토 시키 권리를 얻었고, 나머지 절반은 귀족 소유주가 지대의 형태로 소유하게 되었다.[85]
- 북조 아시카가 씨 천황:
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
1 | 광엄 천황 | 1331–1333 |
2 | 광명 천황 | 1336–1348 |
3 | 숭광 천황 | 1348–1351 |
혼란기 | 1351년 11월 26일 ~ 1352년 9월 25일 | |
4 | 후광엄 천황 | 1352–1371 |
5 | 후엔유 천황 | 1371–1382 |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계승하여 구스노키 씨의 당주가 된 남조의 무장 구스노키 마사유키는 1347년, 후지이데라 전투와 텐노지·스미요시 전투에서 막부의 유력 무장 호소카와 아키우지와 야마나 도키우지를 격파했다.
하지만 상황을 심각하게 본 막부 집사 고노 모로나오는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여 1348년 1월 5일(음력), 시조나와테 전투에서 정행과 그의 동생 구스노키 마사토키 형제를 전사하게 만들었다.
1351년, 다카우지가 나오요시파에 대항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남조에 항복했다. 연호를 남조의 "정평"으로 통일하는 "정평일통"이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다카우지는 정이대장군에서 해임되었다.
다카우지는 1351년 12월 삿타 고개 전투에서 아우 나오요시를 무찌르고, 아시카가 당을 통일했다. 나오요시는 이듬해 2월 26일(구력), 마침 시게나오의 1주기일에 급사했다.
나오요시의 양자이자 후계자이며, 다카우지의 비인지 자이기도 한 아시카가 나오후유는 이후에도 남조와 연계하여 무로마치 막부・북조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간노의 난 이후 남북조는 깊은 수렁에 빠진 전쟁을 계속하여 네 차례에 걸친 교토 전투를 벌였지만, 승패가 나지 않고 서로 쇠약해질 뿐이었다.
직의가 죽은 후, 정평 통일 정권(구 남조)은 이 기회에 교토로 진격하여,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적자이자 재상 중장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몰아내고 교토를 점령, 신기까지 빼앗았다(제4차 교토 전투(하치만 전투)). 요시아키라는 북조 연호를 부활시켜 다시 교토를 탈환했지만, 남조는 후퇴하면서 고광, 광명 두 상황과 퇴위 직후의 스미카타 상황(고광의 황자)을 가나생으로 데려갔다. 이 때문에 북조는 고광의 황자이자 스미카타의 동생인 고코곤 천황을 신기 없이 즉위시켰고, 공무의 관위를 복구시켰으며, 다카우지도 정이대장군에 복귀했다.
구 직의당을 흡수한 남조는 재기하여, 1352년 8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 말까지 남조의 구스노키 마사요시(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셋째 아들)·기라 미쓰사다(구 직의당)·이시타라 요리후사(구 직의당) 등은 셋쓰 전투에서 막부의 아카마쓰 미쓰노리·사사키 히데쓰나·사사키 타카히데·도키 요리야스·니키 요시나가 등을 물리쳤다. 이 기세를 몰아 1353년 6월 9일, 남조는 제5차 교토 전투에서 교토를 탈환했다. 그러나 막부의 대공세를 받아 7월 24일 교토를 포기하고, 한 달 반이라는 단기간의 지배로 끝났다.
1354년, 남조의 실질적 지도자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사망하고 남조는 두뇌를 잃었다. 그러나 아시카가 나오후유가 남조에 합류하면서 다시 무력을 회복하여, 1355년 2월, 나오후유와 구스노키 마사요시는 제6차 교토 전투(신난 전투)에서 교토의 일시적 점령에 성공했다. 그러나 동국에서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압박해오자 남조는 다시 교토를 포기했다.
1358년 4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죽자 신다 요시사다의 유자 니타 요시무네와 데와로 도망쳤던 기타바타케 아키노부 등이 재기하려 했지만, 조직적인 봉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무로마치 막부의 새로운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는 무위를 보이기 위해 남조 소탕의 대공세에 나서, 구스노키 씨의 본성인 가와치국 아카사카성 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구스노키 마사요시는 전투를 산악전으로 끌고 가 장기화시켰고, 이로 인해 막부 측은 니키 요시나가·관동집사 하타케야마 구니키요·집사 호소카와 기요우지 등 유력 무장들이 잇달아 반기를 들었고, 막부의 세력은 결국 원래대로 돌아갔다.
1361년, 막부 내의 항쟁에서 실각한 호소카와 기요우지는 남조에 귀순하여, 구스노키 마사요시 등과 연합하여 제7차 교토 전투에서 일시적으로 교토를 점령했다. 그러나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탈환되었고, 남조는 열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시대에는 오우치 히로요나 야마나 도키우지 등도 무로마치 막부에 귀복했다.
1368년 4월, 어린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원복하였고, 그의 우보시오야가 된 무로마치 막부 관령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실권을 장악하여 명재상으로서 요시미쓰를 보좌하였다.
같은 해, 요리유키는 사찰본소령사(일명 "'''오안대법'''")를 발포하였고, 이후에도 뛰어난 내정 수완으로 막부의 안정을 확립해 나갔다.
같은 해, 남조에서 강경파 조케이 천황이 즉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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